궁합이라는 말은 요즘 사주 이야기에서 거의 매일 나와요. 그래서 이 말이 옛 기록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가 궁금해졌고, 국사편찬위원회가 열어 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검색 창구를 직접 열어 한자 宮合을 세어 봤어요.
결과부터 적을게요. 조선왕조실록에서 잡히는 건수는 여덟 건이에요. 그런데 그 여덟 건을 원문 전문으로 하나씩 다시 받아 읽어 보니 혼인 궁합인 자리는 한 건도 없었어요. 전부 앞 낱말과 뒤 낱말이 끊긴 채 두 글자가 우연히 이웃한 자리였어요.
승정원일기 쪽은 예순 건이에요. 이 예순 건도 전부 상세 화면을 받아 세어 봤는데, 쉰네 건이 혼인과 상관없는 자리였고 그중 마흔일곱 건이 관을 짜는 이야기였어요. 혼인 궁합으로 읽히는 자리는 여섯 기사뿐이었고요.
그리고 그 여섯 기사가 재미있어요. 여섯 가운데 셋에서 임금이 궁합을 눌러요. 영조는 두 번이나 같은 사람을 반례로 들었고, 정조는 궁합과 사주만 오로지 취할 수는 없다고 말했어요.
잰 범위를 먼저 적어 둘게요. 아래 숫자는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오전 10시 35분부터 11시 40분 사이 한국 시각에 두 창구에서 직접 받은 응답 안에서만 센 값이에요. 실록 쪽 분모는 태조부터 순종까지이고, 승정원일기 쪽 분모는 인조부터 순종까지예요. 그 앞 시기의 승정원일기는 남아 있지 않아서 창구의 왕대 목록 자체가 인조부터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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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셌는지부터 적을게요
숫자를 옮기기 전에 창구를 세워 둘게요. 이 글이 연 기관은 한 곳이고 창구는 넷이에요.
| 창구 | 기관 | 이 글이 쓴 쓰임 |
|---|---|---|
| 조선왕조실록 통합검색 | 국사편찬위원회 | 낱말별 국역·원문 건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상세 | 국사편찬위원회 | 여덟 건 전문 확인과 축자 인용 |
| 승정원일기 통합검색 | 국사편찬위원회 | 낱말별 건수와 왕대 분류 |
| 승정원일기 기사 상세 | 국사편찬위원회 | 예순 건 전문 확인과 축자 인용 |
세는 방법에는 함정이 둘 있었고, 둘 다 밟고 나서야 알았어요.
첫째, 승정원일기 검색은 주소줄로 보내야 해요. 검색 폼에 전송 방식이 적혀 있지 않아서 처음에 다른 방식으로 보냈더니, 어떤 낱말을 넣어도 응답 크기가 글자 하나까지 똑같은 같은 화면이 돌아왔어요. 질의가 통째로 무시된 건데 응답은 정상으로 떨어지니까 그대로 믿으면 모든 낱말이 같은 건수로 잡혀요. 방식을 바꾸고 나서야 낱말마다 응답 크기가 갈렸고, 그때부터 숫자가 의미를 가졌어요.
둘째, 상세 화면에서 두 글자가 갈라져 있을 수 있어요. 이 창구는 궁궐 이름 같은 고유명사를 따로 묶어서 보여 줘요. 그래서 저경궁 다음에 합벽이 오는 자리를 처음 훑었을 때는 宮合이 아예 안 잡혔어요. 태그를 지우면서 그 자리에 빈칸이 하나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예순 건 전부를 태그를 지운 다음 공백까지 전부 지운 글줄로 다시 훑었어요. 그랬더니 0회로 잡혔던 세 건이 되살아났고, 반대로 관 짜는 기록 안에 진짜 궁합이 숨어 있는 경우가 없다는 것도 같이 확인됐어요.
이게 중요한 이유는 이래요. 첫 훑기에서 0이 나왔다고 없는 게 아니에요. 그 0은 글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가 글자 사이에 빈칸을 넣었기 때문이었어요.
조선왕조실록의 궁합 여덟 건은 전부 딴 낱말이에요
실록 창구는 국역과 원문을 따로 세어요. 宮合은 국역 0건, 원문 8건이에요. 그 여덟 건을 전부 기사 상세로 열어 원문 전문을 받고, 앞뒤 글자를 붙여 읽었어요.
| 기사 | 실제로 끊기는 자리 | 이 기사에서 나온 횟수 |
|---|---|---|
| 태종 3년 6월 29일 | 흥신궁 + 합장흥고, 연경궁 + 합군자감, 연복궁 + 합의영고 | 3 |
| 태종 17년 11월 2일 | 중궁 + 합장 | 1 |
| 연산군일기 11년 8월 26일 | 삼궁 + 합경 | 1 |
| 중종 34년 7월 21일 | 동궁 + 합계 | 1 |
| 현종 14년 6월 20일 | 현궁 + 합판 | 2 |
| 현종개수실록 14년 6월 20일 | 현궁 + 합판 | 2 |
| 숙종 6년 8월 3일 | 재궁 + 합목 | 1 |
| 고종 7년 1월 22일 | 각 궁 + 합봉 | 1 |
여덟 기사에서 열두 번 나왔고, 혼인 궁합은 0건이에요.
태종 3년 기사가 가장 알기 쉬워요. 그날 기사는 필요 없는 관청을 줄이고 관제를 개편한 내용인데, 흥신궁을 장흥고에 합치고 연경궁을 군자감에 합치고 연복궁을 의영고에 합친다는 문장이 잇달아 나와요. 그러니까 여기서 合은 합친다는 동사예요. 앞 글자 宮은 앞에 놓인 궁 이름의 마지막 글자고요.
태종 17년 기사는 조금 다른 결이에요. 임금이 예조에 동혈에 장사 지내는 제도를 상고해 아뢰라고 시키면서, 내가 죽으면 중궁과 합장하고 싶다고 말해요. 여기서 宮은 중궁의 끝 글자고 合은 합장의 첫 글자예요.
현종 14년 6월 20일 기사는 송시열을 둘러싼 논란인데, 그 죄목 가운데 하나로 현궁의 합판이 나와요. 현궁은 능의 광중이고 합판은 널을 붙여 쓴 일이에요. 같은 날 같은 사안을 현종개수실록도 적어서 두 건이 됐어요.
여기서 한 가지는 미리 밝혀 둘게요. 연산군일기는 실록이 아니라 일기예요. 실록 창구 안에 함께 들어 있어서 건수에 포함했지만, 여덟 건 가운데 한 건은 일기라는 점을 알고 읽어 주세요.
승정원일기 예순 건 가운데 쉰네 건은 혼인과 상관없어요
승정원일기 쪽 宮合은 예순 건이에요. 창구가 내려 주는 왕대 분류는 이래요.
| 왕대 | 건수 |
|---|---|
| 인조 | 1 |
| 현종 | 4 |
| 숙종 | 10 |
| 영조 | 15 |
| 정조 | 8 |
| 순조 | 8 |
| 헌종 | 3 |
| 철종 | 2 |
| 고종 | 9 |
합이 예순이에요. 이걸 왕대별로 쪼개 받아서 예순 건의 기사 번호를 전부 확보하고, 한 건씩 상세를 열어 앞뒤 글자를 셌어요.
결과는 이래요.
| 갈래 | 기사 수 |
|---|---|
| 재궁 + 합목 | 47 |
| 함흥본궁 + 합행의절 | 2 |
| 교궁 + 합위 | 1 |
| 저경궁 + 합벽 | 1 |
| 정빈궁 + 합지 | 1 |
| 전궁 + 합행의절 | 1 |
| 각 궁 + 합봉 | 1 |
| 혼인 궁합 | 6 |
쉰네 건이 낱말이 끊긴 자리고, 여섯 건이 혼인 궁합이에요.
압도적인 갈래인 재궁 합목이 뭔지 짚고 갈게요. 재궁은 왕과 왕비의 관이고, 합목은 그 널판을 맞붙이는 작업이에요. 장생전이라는 관청이 그 일을 맡았고, 승정원일기에는 합목을 시작하겠다거나 합목이 끝나 이제 칠을 하겠다는 계사가 같은 틀로 되풀이돼요.
그런데 이 재미없어 보이는 마흔일곱 건 안에 택일이 어떻게 굴러갔는지가 통째로 들어 있어요. 합목 길일을 일관에게 추택하게 했다는 문장이 반복되고, 현종 즉위년 기사에는 아예 관상감의 택일에 따라 그날 그 시각에 역사를 마쳤다고 적혀 있어요.
가장 눈에 띄는 건 숙종 46년 6월 23일 기사예요. 외재궁 합목 길일을 그달 스무닷새 진시로 택해 재가를 받아 뒀는데, 재궁에 은정을 박고 칠을 올리는 일이 같은 날 사시라서 장생전 당상이 두 자리에 다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합목 길시를 일관에게 다시 물었고, 같은 날 미시가 길하다는 답을 받아 그 시각으로 물렸어요.
길한 시각이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면 물릴 수가 없죠. 다시 물으니 같은 날 안에서 다른 시각이 나왔어요. 날짜와 시각을 고르는 일이 어떻게 운영됐는지를 이보다 또렷하게 보여 주는 자리도 드물어요. 날짜를 고르는 일 자체가 어떤 규칙을 타고 정해지는지는 일진과 윤달이 정해지는 조문에 따로 적어 뒀어요.
혼인 궁합은 여섯 건이고 그중 셋에서 임금이 궁합을 눌러요
이제 여섯 건이에요. 연대순으로 놓으면 이래요.
| 기사 | 해 | 어떤 자리인가 |
|---|---|---|
| 영조 33년 2월 24일 | 1757 | 산릉 자리를 의논하다가 임금이 궁합을 반례로 든다 |
| 영조 41년 6월 11일 | 1765 | 길일이 없다는 보고에 임금이 궁합을 반례로 든다 |
| 정조 15년 6월 5일 | 1791 | 혼인을 권하는 정책 이야기 중에 두 집의 궁합이 맞는다 |
| 정조 24년 2월 26일 | 1800 | 세자빈 초간택, 국복에게 사주와 궁합을 묻는다 |
| 정조 24년 2월 27일 | 1800 | 임금이 궁합과 사주만 취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
| 고종 19년 1월 15일 | 1882 | 세자빈 초간택, 국복에게 사주와 궁합을 묻는다 |
여섯 가운데 셋이 궁합을 누르는 자리예요. 하나씩 볼게요.
영조 33년 2월 24일 기사는 정성왕후의 능 자리를 의논하던 날이에요. 신하 하나가 국장에 쓸 자리는 반드시 귀신이 지키며 기다린다는 식으로 말하자, 임금이 술가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받아요. 그러면서 곧바로 반례를 들어요. 정명공주와 영안위는 궁합이 좋지 않다고들 했는데, 자손이 많기가 이보다 더한 경우가 없다고요.
여덟 해 뒤인 영조 41년 6월 11일 기사에도 같은 사람이 또 나와요. 이번엔 택일 이야기예요. 팔월과 구월 안에 길일이 없어 시월로 가야겠다는 보고를 받고, 이달에도 길일이 없다는 말까지 듣고 나서 임금이 이렇게 말해요. 주나라는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느냐. 그러고는 저 영의정의 고조모는 궁합이 괴이하다고 했는데도 복이 많았다고 한다고 덧붙여요. 그 자리에서 영의정이 신의 고조모 정명공주는 스물한 살에 하가했다고 답해요.
같은 임금이 팔 년 사이에 같은 사람을 두 번 반례로 들었어요. 한 번은 산릉의 풍수를 물리치면서, 한 번은 택일의 길일을 물리치면서요.
셋째는 정조예요. 정조 24년 2월 27일 기사에서 임금이 초간택을 되짚으며 말해요. 용모며 지벌이며 구하는 바가 한 가지가 아니니 궁합과 사주의 추험만을 오로지 취할 수는 없다고요. 그런데 같은 기사 안에 이런 말도 있어요. 옛 관례를 폐할 수 없어 국복에게 물으니 궁합과 사주가 모두 대길이라 했다고요.
그래서 이 대목은 부정이 아니라 유보예요. 실제로 물어보기는 했고, 다만 그것만으로 정하지는 않았다고 말한 자리예요. 이걸 정조가 궁합을 부정했다고 옮기면 사료보다 세게 말하는 게 돼요.

국복이 부른 궁합 이름은 생기와 복덕과 유혼이에요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뜻밖이었던 자리예요.
정조 24년 2월 26일 기사를 읽어 보면, 임금이 국복에게 간택 단자 안의 사주를 하나씩 물어요. 기유년 오월 열닷새 유시면 어떠냐고 묻자 국복 김해담이 그 사주는 기유 경오 신미 정유이고 크게 길하고 크게 귀한 격이라고 아뢰어요.
그러고 나서 임금이 궁합은 어떠하냐고 물어요. 김해담의 답이 이래요. 유혼궁합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궁합도 좋습니다라고 덧붙이고, 이처럼 크게 길한 명이라면 궁합을 다시 논할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해요.
조금 뒤 임금이 경술년은 무슨 궁합이냐고 묻자 다른 국복 이동진이 생기궁합입니다라고 아뢰어요.
고종 19년 1월 15일 기사도 틀이 똑같아요. 국복 안경린 등이 사주를 아뢰자 임금이 궁합은 어떠하냐고 묻고, 복덕궁합입니다라는 답이 돌아와요.
그러니까 이 두 사료에 남은 왕실의 궁합 판정어는 유혼, 생기, 복덕 셋이에요. 요즘 흔히 쓰는 겉궁합이나 속궁합, 띠궁합 같은 말이 아니에요. 확인해 보려고 같은 방식으로 천의, 절체, 화해, 오귀, 절명 다섯 가지도 각각 궁합 앞에 붙여 질의했어요.
| 질의한 낱말 | 승정원일기 건수 |
|---|---|
| 생기궁합 | 1 |
| 복덕궁합 | 1 |
| 유혼궁합 | 1 |
| 천의궁합 | 0 |
| 절체궁합 | 0 |
| 화해궁합 | 0 |
| 오귀궁합 | 0 |
| 절명궁합 | 0 |
앞의 셋만 있고 뒤의 다섯은 0이에요. 그것도 셋이 두 기사에 몰려 있어요. 생기와 유혼은 정조 24년 기사 한 건 안에 같이 있고, 복덕은 고종 19년 기사에 있어요.
여기서 한 가지는 조심해서 적을게요. 이 세 이름의 길흉이 어떻게 배열되는지는 두 사료가 적어 두지 않았어요. 이 글이 확인한 것은 국복이 그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과, 유혼이라고 아뢴 바로 그 자리에서 곧바로 궁합도 좋다고 덧붙였다는 축자까지예요. 그 이상은 이 두 창구 밖의 이야기예요. 오행을 짝지어 관계를 보는 요즘 방식이 궁금하면 사주 오행 궁합 상생상극 쪽을 따로 보시는 게 나아요.
궁합을 아뢴 사람은 아홉 번밖에 불리지 않았어요
궁합을 아뢴 사람을 사료는 국복이라고 불러요. 이 낱말도 세어 봤어요. 승정원일기에서 한자 國卜은 아홉 건이에요.
아홉 건을 전부 열어 보니 한 건은 빼야 했어요. 영조 4년 12월 23일 기사인데, 우리나라라는 말의 끝 글자와 다음 낱말의 첫 글자가 붙어서 잡힌 자리였어요. 앞에서 본 것과 똑같은 함정이에요.
남은 여덟 건은 이래요.
| 기사 | 해 | 내용 |
|---|---|---|
| 정조 24년 2월 26일 | 1800 | 관상감 제조와 예조 참판이 국복 김해담과 이동진을 데리고 대령하다 |
| 정조 24년 2월 26일 | 1800 | 국복이 입시해 사주와 궁합을 아뢰다 |
| 정조 24년 2월 27일 | 1800 | 옛 관례를 폐할 수 없어 국복에게 물었다고 말하다 |
| 순조 9년 6월 23일 | 1809 | 국복 이동진의 유고로 후임을 차출했으니 녹을 어떻게 할지 묻다 |
| 고종 19년 1월 요목 | 1882 | 관상감 제조와 예조 참의가 국복을 데리고 입시하다 |
| 고종 19년 1월 14일 | 1882 | 내일 국복을 데리고 대령하라는 하교 |
| 고종 19년 1월 15일 | 1882 | 국복을 데리고 대령했다는 계 |
| 고종 19년 1월 15일 | 1882 | 국복 안경린 등이 입시해 사주와 궁합을 아뢰다 |
여덟 건이 딱 두 번의 세자빈 초간택과 인사 한 건에 몰려 있어요. 1800년과 1882년이에요.
이게 무슨 뜻인지 짚어 볼게요.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이 날마다 받아 적은 기록이에요. 그 방대한 기록 안에서 궁합을 아뢰는 사람이 불려 들어온 자리가 여든 해 사이에 두 번이었다는 거예요. 순조 9년 기사는 그 국복이 관상감에 딸려 녹을 받는 자리였다는 것도 알려 줘요. 국복 이동진에게 탈이 나 후임 이현명을 차출했으니 전례대로 녹을 붙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 계사거든요.
대조가 되라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낱말도 세어 봤어요.
| 낱말 | 승정원일기 건수 |
|---|---|
| 일관 | 7,118 |
| 택일 | 6,653 |
| 사주 | 263 |
| 궁합 | 60 |
| 국복 | 9 |
날을 고르는 일관은 칠천 건이 넘고, 궁합은 예순 건이에요. 다만 일관 쪽 숫자에는 유보가 있어요. 첫 쪽 오십 기사의 쉰세 자리만 앞뒤 글자를 확인했고 거기서는 전부 관직 일관이었지만, 나머지 칠천여 건은 열지 않았어요. 그러니 이 표는 같은 방식으로 센 두 값의 크기 비교로만 읽어 주세요.

같은 날을 실록과 승정원일기가 다르게 적었어요
정조 24년 2월 26일은 두 사료에 모두 남아 있어요. 그래서 나란히 놓고 세어 봤어요.
| 승정원일기 | 조선왕조실록 | |
|---|---|---|
| 궁합 등장 | 7회 | 0회 |
| 사주 등장 | 여러 후보에 걸쳐 반복 | 후보 하나만 |
| 일관 지경철 지시 | 있음 | 없음 |
승정원일기 쪽에는 임금이 궁합이 어떠하냐고 묻는 문답이 두 번 나오고, 유혼궁합과 생기궁합이라는 답이 그대로 적혀 있어요. 게다가 임금이 일관 지경철을 불러들여 사주 간지를 맞춰 보는 일이 자꾸 늦어지니 국복 곁에 있다가 천세력으로 그 달과 날과 시가 무슨 간지인지 찾아 즉시 알려 주라고 시키는 대목까지 있어요. 간지를 그 자리에서 책으로 찾아 넘겨 주던 실무 장면이에요.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의 같은 날 같은 자리 기사에는 궁합이라는 말이 한 번도 없어요. 사주도 첫 후보 하나만 옮기고, 대신 임금이 김조순 가문에 대해 처음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현륭원에 참배하던 날 밤 꿈이 좋았다는 이야기를 길게 실었어요.
어느 쪽이 맞느냐를 물을 자리가 아니에요. 날마다 받아 적은 기록과 뒤에 가려 뽑은 기록은 남기는 것이 달라요. 궁합 이야기가 실록에서 빠졌다고 해서 그날 궁합을 묻지 않은 게 아니고, 실록에 꿈 이야기가 실렸다고 해서 승정원일기가 그걸 감춘 것도 아니에요. 사료를 하나만 열면 통째로 놓치는 게 생긴다는 뜻이에요. 낱말 하나를 두 창구에서 따로 세어 보면 왜 값이 갈리는지는 사대명절과 사명일을 세어 본 기록에도 비슷한 사례로 적어 뒀어요.
이 숫자로 말할 수 없는 것
여기까지 읽고 조선 사람들은 궁합을 안 봤구나로 정리하면 곤란해요. 이 글이 잰 것은 딱 하나예요. 관찬 기록 두 종 안에서 한자 두 글자가 몇 번 적혔는가.
실록과 승정원일기는 국가의 기록이에요. 여염집 혼사에서 사주단자를 주고받았는지, 마을에서 누가 궁합을 봐 줬는지는 애초에 이 기록이 담는 대상이 아니에요. 문집이나 예서나 민간 택일서는 이번에 열지 않았고요.
실제로 낱말이 갈릴 여지도 같이 확인해 봤어요. 혼인을 합한다는 뜻의 合婚을 넣어 보니 실록 원문 3건, 승정원일기 0건이었어요. 혼인을 점친다는 뜻의 婚占은 실록에서 국역과 원문 모두 0건이었고요. 그러니 다른 말로 적혀 있어서 안 잡힌 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도 제가 떠올린 몇 낱말로 확인한 범위일 뿐이에요.
건수를 읽을 때 조심할 점도 하나 있어요. 실록 창구는 국역과 원문을 따로 세서 합쳐 보여 줘요. 四柱의 경우 국역 16건에 원문 27건이라 화면에는 43으로 뜨는데, 기사 번호의 앞 글자를 떼고 맞춰 보니 양쪽에 겹치는 기사가 열한 건이었어요. 실제로 서로 다른 기사는 서른두 건이에요. 국역 색인은 번역자가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해 둔 자리만 잡거든요. 화면에 뜬 숫자를 기사 수로 옮기면 틀려요.
그 사주 쪽 국역 16건도 한 번 갈라 봤는데, 결이 좀 달라요. 혼인과 관련된 자리는 세종 7년의 세자 배필 점치기, 명종 16년의 세자빈 정친례, 정조 24년의 간택 사주까지 세 건이에요. 나머지 열두 건은 추국이나 고변이나 옥사 기록이고, 한 건은 태종실록 총서예요. 사주라는 말이 실록에 남을 때는 혼사보다 국청에서 훨씬 자주 남았어요.
명종 16년 기사는 특히 씁쓸해요. 왕세자의 정친례를 거행한 날 기사인데, 윤원형이 몰래 모의해 황대임의 딸 생년월일을 길한 사주로 고쳤다는 내용이 함께 적혀 있어요. 사주가 판단의 근거였다기보다, 이미 정해 둔 결론에 맞추려고 고쳐진 자리예요.
정리
이 글이 두 창구에서 확인한 것만 다시 모으면 이래요.
- 조선왕조실록에서 한자
宮合은 8건이고, 여덟 건 전부 앞뒤 낱말이 끊긴 자리라 혼인 궁합은 0건이에요. - 승정원일기에서
宮合은 60건인데, 54건이 재궁 합목을 비롯한 낱말 경계 자리이고 혼인 궁합은 6건이에요. - 그 6건 가운데 3건에서 임금이 궁합을 누르거나 유보해요. 영조는 두 번 정명공주를 반례로 들었고, 정조는 궁합과 사주만 취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 왕실 기록에 남은 궁합 이름은 유혼, 생기, 복덕 셋뿐이고, 나머지 다섯 가지 이름은 0건이에요.
- 궁합을 아뢴 국복은 승정원일기에 9건 나오는데 한 건은 경계 사고이고, 나머지 8건이 두 번의 세자빈 초간택과 인사 한 건에 몰려 있어요.
- 같은 날 같은 자리를 승정원일기는 궁합 7회로 적었고 조선왕조실록은 0회로 적었어요.
궁합이 오래된 말이냐고 물으면, 적어도 이 두 사료 안에서는 드물게 적혔고 적힐 때도 결정을 뒤집는 자리에 놓이지 않았다고 답할 수 있어요. 임금이 물어보긴 했지만, 물어보기 전에 이미 마음을 정해 둔 자리가 기록에 그대로 남아 있거든요. 오늘 누가 궁합 이야기를 꺼내면 이 여섯 건을 떠올려 보셔도 좋겠어요.